고대신문이 2015년 학내 10대 사건을 뽑았다. 고려대학교의 2015년은 큰 사건 없이 지나간 1년이면서도 의미를 되짚어야 할 사건이 많은, ‘정중동’의 한 해였다.사진| 고대신문 DB 19대 총장에 염재호 박사 취임 올해는 염재호(정경대 행정학과) 교수가 본교 제 19대 총장으로 취임한 첫 해다. 2월 27일 열린 취임식에서 ‘개척하는 지성, 개혁하는 고대’를 내세운 염재호 총장은 두 학기 동안 학사제도와 행정체계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염재호 총장은 취임 이후 학사제도 개편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요즘 페미니즘은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요? 사회 구성원이 용인할 수 있는 내용과 방법으로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해야죠. 자꾸만 극단적으로 행동하니까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다른 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오빠가 인정한 페미니즘’만 하자는 거죠?”대타협이 대세다. 노사정이니 여야니 틈만 나면 대타협 타령이라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타협했다”고 하지 않고 “대타협을 이뤄냈다”는 포장을 해대지만, 결국 본질은 같다. 더 많이 가진 자에게 구걸해 그럴듯한 약속을 받아냈다는 의미다. 비단 기성세대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2008년 광우병 집회 이후 최다 인파가 집결했다. 주최 측 추산 13만 명, 경찰 측 추산 8만 명이 집결한 이번 총궐기에서 참여자들은 재벌책임 강화, 농업, 민주주의, 청년학생, 세월호 등 11대 요구안을 외쳤다.하지만 정작 집결 장소로 지정됐던 광화문에는 한 발짝도 디디지 못한 채 총궐기는 마무리됐다. 이후 ‘불법폭력시위’라는 프레임까지 더해져 비판여론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민중총궐기의 의의는 무엇이었으며 어떤 숙제를 남겼을까. 총궐기에 참여했던 학내 단체 구성원과 20일 좌담
유난이었다. 토요일이 오기도 전에 온갖 ‘갈등’이 터졌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이번에야말로 뒤집자는 구호 아래 사람들을 모았다. SNS에도 학교 게시판에도 온갖 자보가 붙었고 집회 꽤나 다닌다는 사람들은 “이번에 가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경찰은 강경대응을 강조하며 맞불을 놨다. 언론은 시위대가 쇠파이프로 의경을 가격하는 장면을 자료화면으로 내보냈고 일부 사람들은 “또 불온세력이 국가를 뒤집으려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그래도 평온한 금요일이었다. 내일, 광화문에서 ‘민중’ ‘총궐기’가 있다고는 생각 할 수 없을 만큼. 강의
12일 밤 9시, 대학로 후미진 골목에 있는 도어즈 LP바를 찾았다. 왠지 모를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는 뭉툭하고 튼튼해 보이는 나무문, 그 위에 살짝 먼지가 앉은 빨간 브로마이드가 무심히 걸려있다. 음산할 정도로 깜깜한 시야 너머로 노란 조명을 받아 빛나는 브로마이드. 그 안의 빨간 남성은 60년대 미국을 강타했던 록 그룹 ‘The doors’의 멤버 짐 모리슨이다. 그 록 그룹의 이름을 딴 도어즈 LP바의 문을 여니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열차 시간 다가올 때 두 손 잡던 뜨거움 기적 소리 멀어지면
“사랑에 정복당할 시간도 없는 희한한 시대에서 열심히 사는구나.”‘희한한 시대’에서 살아가는 ‘희한한 우리’에게 오늘도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희한한 가수’가 있다. 20대, 그리고 30대의 청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옥상달빛 김윤주 씨와 박세진 씨에게 음악이 주는 위로에 대해 들어봤다. 그들이 생각하는 청춘은 무엇이고, 그들의 어떤 이야기가 음악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게 했을까. - 곡을 쓸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윤주│“진정성이요. 그래서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려 해요. 같은 일을
본지는 11일부터 13일까지 본교생으로부터 각자의 사연이 깃든 노래를 제보받았다. 그 중 5명의 사연을 선정해 지면에서 소개한다. 14학번 A ‘청춘 – 하비누아주’ “큰 다리를 건너는 그림자를 봤어그 언젠가 어둡고 황량한 길에서이 적막을 지나면 어디든 닿을까달리던 커다랗고 거친 나의 슬픔을” ‘청춘’이라는 단어에는 단지 ‘靑春’이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만 담겨있지 않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어느 순간 저를 돌아보니 ‘목표’에 대한 의심 없이 ‘달려야만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더라고요. 너무나
시간강사. 2014년 기준 전체 대학교 평균으로 볼 때 전체 교원 10명 중 4명꼴로 존재하는 이들은 법적으로 교원이 아니다. 4대 보험도, 퇴직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은 3학점 강의 하나에 평균 6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방학이면 특별한 일거리가 없는 이들은 학기 중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강의를 맡기도 한다. ‘보따리 장사’, ‘지식 행상꾼’이라는 별명은 그들의 특징을 잔인하리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발의된 ‘고등교육법 및 후속 법령 개정안’, 일명 ‘시간강사법’은 시행논의만 5년째 지속되고 있
자신은 그저 수많은 지방대 시간강사 중 한명이라고 했다. ‘노오력’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박복한 청춘을 살아온 평범한 삼십대. 언제나 책을 붙잡고 있다가 문득 쓰는 것이 더 좋아졌다는, 그저 그런 이유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박사과정 수료생.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평범한 연재물은 그렇게 시작됐다. 왜일까.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러 매체에서 연재되기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200만 번이 넘는 클릭을 이끌었다. 6일, 이것을 엮은 책도 나왔다. 첫 장을 넘
본교 민주광장엔 3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텐트 하나가 있다. 2007년부터 시간강사 지위 회복을 위해 운동하고 있는 김영곤 전 강사가 설치한 농성 텐트다. 김 전 강사가 본교에 꾸준히 시간강사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낸 지도 10년 가까이 됐다. 그동안 본교 시간강사의 지위 회복과 처우 개선은 이뤄졌을까. 본교의 시간강사 강의료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인상되지 않다가 2011년 1500원(2.5%) 인상돼 현재와 같은 5만1800원을 유지하고 있다. 윤관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본지 편집국은 한 학기마다 구성원이 조금씩 바뀐다. 임기를 채운 기자들이 나가면 새로운 얼굴들이 빈자리를 메운다. 창간 당시로부터 68년이 지난 지금, 2015년 2학기의 편집국은 어떤 모습일까. 편집국 내부 자체 설문조사를 실시해 의미 있는 숫자들을 뽑았다. 좀처럼 보기 힘든 유쾌한 방법으로 현재의 편집국을 소개한다.
6월 어느 날, 손목시계가 고장 났다. 2년 넘게 차던 시계가 없어지니 손목의 허전함이 적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과반 후배가 팔찌를 선물했다. 세월호 사건 500일 당시 안산에 다녀오며 샀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시계가 없어진 손목에 노란색 팔찌를 찼다. 시계를 보던 버릇이 남아있어 손목을 돌릴 때면 ‘Remember 20140416’이라는 선명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고장 난 시계가 내 서랍장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역사의 시계마저 고장 난 모양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발상과 폭언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정부가 국사 교과
보건복지부는 7일 내년 12월부터 담뱃갑에 경고그림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는 국민건강증진법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다고 밝혔다. 2014년 9월 발표된 ‘범정부 금연종합대책’의 후속 정책으로 이번 개정안을 제시한 정부는 담뱃값 인상, 금연구역 확대와 더불어 흡연자 규제를 본격적으로 강화하는 모양새다.하지만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정책을 두고 ‘모양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책시행 이후 지금껏 흡연율 하락이 미비해 세수만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흡연자의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진행된다는 이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치며 분신한 최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하려다 경찰과 마찰이 있었어. 그러다가 소녀상에 머리를 부딪쳤는데 후유증이 있나봐.”병원을 다녀왔다는 전태삼(남·66) 씨에게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1970년 11월, 형의 죽음을 신문으로 접해야했던 한이 남아서였을까. 지금도 현장의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그를 만나 전태일과 청년의 길을 물었다. 형에 대한 기억을 묻자 그는 청계천을 떠올렸다. “내가 11살 즈음 13살이던 형과 청계천 곳곳을 쏘다니며 방비, 적쇠, 솔 같은걸 팔고 그랬어. 용두동에서
청년이 있었다. 어머니가 쥐어준 차비로 아이들에게 풀빵을 나눠주던 청년은 캄캄한 밤길을 걷고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청년을 나무라던 어머니가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거란 어머니의 질타에도 청년은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청년은 어머니께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못 다한 일을 이뤄 달랬다. 어머니는 이 한 마디를 끝까지 붙잡았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자식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다독이고 같이 울었다.어머니가 떠난지 꼭 4년이 지났다. 어머니와 청년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청년을 이야기했다.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 공터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못 다 이룬 꿈을 꼭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에 따라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항상 노동자와 함께한 이소선 어머니는 2011년 9월 3일 아들의 곁으로 갔다.전태일 재단(이사장=이수호)은 전태일 45주기와 이소선 4주기를 맞아 2015년 9월 3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전태일·이소선 추모기간’으로 정했다. ‘세상의 모든 전태일, 하나 되는 불씨’의 구호아래 2015년 청년 노동자는 어떤 환경을 마주하고 있을까. 전태일 평
12일 광주지방법원은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2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다음날 수원지방법원 역시 같은 판결을 내렸다. DMZ에서 폭발한 지뢰가 북한군의 목함지뢰와 일치한다는 국방부의 발표 직후였던 탓인지 여론은 병역거부자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다. 무죄판결을 다룬 한 포털의 뉴스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지뢰제거반으로 활용하자”는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얻기도 했다.병무청의 통계에 따르면 신념이나 종교 등 개인의 양심적 판단에 근거해 병역을 거부하는 인원은 매년 약 600명에 달한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 대체복무법안을 발의한 계기가 궁금하다“대체복무제를 최초로 발의하신 임종인 변호사와 같은 법무법인에서 활동하며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변호했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으로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한명숙 국무총리가 ‘비전2030 국가인적자원 활용방안’을 발표하고 국방부도 대체복무제 도입방안을 발표하는 등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기 위한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 과정에 참여하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고 그것이 법안 발의의 토대가 됐다.”- 입법 활동을 하며 아쉬운 점이 있다면2008년에 정권이 교체된 후 정부는 병역
- 변호사 시절부터 병역거부자 변론을 해왔다“1980년 고대 대학원을 수료하고 군 법무관 시험에 합격해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10년간의 군 법무관 생활을 마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에서 활동하던 중 2001년에 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특집기사를 마련하니 글을 써달라는 요구를 받게 됐다. 군 법무관 시절의 경험을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돌이켜보니 2000년대 이후 여러 민주화의 진전 속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인 이
문득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도, 방법도 각각 다른 그들에게서 법정에선 이야기하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당당했다. 이름도, 얼굴도 숨기지 않았다.20대의 시기에 양심에 따라 소수자의 길을 선택한 그들에게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고민을 해달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고민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고민을 할 수 있을까. 박유호 (28, 입영거부)왜 병역거부를 결심하게 됐냐는 질문에